지난 글 「엔지니어의 리더십: 오탐과 미탐, 기술의 판단 기준」에서 실체와 뷰를 언급했습니다. 업무의 뷰는 필요에 의해 설계하고 만들어 갑니다. 하지만 일상의 뷰는 다릅니다. 별도로 설계하지 않아도, 살아온 경험을 통해 알아서 만들어집니다.
3차원 물체는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원기둥을 정면에서 보면 사각형이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원입니다. 같은 실체라도 어느 축에서 보느냐가 뷰를 정합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경험을 통해 그 축을 확장하고 볼 수 있는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집니다. 하지만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축에서는, 그 면이 존재해도 쉽게 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내가 보는 면을 상대는 보지 못하고, 상대가 보는 면을 나는 보지 못합니다. 대화가 어긋나고 설득이 실패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이 글에서는 뷰를 만들어 내는 축이 어떻게 생기고 바뀌는지, 경험이 다른 사람 사이에서 설득이 왜 어려운지, AI 시대에 이 문제가 어떻게 더 까다로워졌는지, 그리고 대화에서 상대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목차
직교성(orthogonality), 보이지 않는 축
대학원에서 프로그램이 가진 성질들과 각 성질들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연구를 했습니다. 어떤 성질들은 서로 영향을 끼치고, 어떤 성질들은 독립적입니다. 이렇게 독립적인 관계를 직교(orthogonal)한다고 합니다. 한 성질의 값을 알아도 다른 성질의 값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개념을 뷰를 구성하는 축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령 자동차를 판단할 때 “주행 질감”이라는 축으로 차를 아무리 깊이 들여다봐도, “소프트웨어”라는 축의 값은 나오지 않습니다. 두 축은 직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승차감”은 주행 질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뷰를 구성하는 축과 직교하는 축을 내가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축에 담긴 정보는 아무리 자세히 봐도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축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글의 표현으로 옮기면, 경험에 없는 축은 미탐입니다. 분명히 있는데 내 뷰가 잡아내지 못합니다. 반대로 뷰가 잘못 잡은 것은 오탐입니다. 오탐의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왜곡된 정보가 뷰의 재료가 된 경우, 그리고 입력은 멀쩡한데 해석을 스스로 비틀어 버린 경우입니다. 이 구분은 뒤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축은 언제 생길까요. 제 경우는 무언가를 직접 경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보통 설명을 듣거나 자료를 읽을 때는 기존 경험이나 지식에 기반해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려고 하고, 그 순간 왜곡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직접 경험하고 이해하고 해석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경험, 새로운 축
저는 차의 메카닉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동차 동호회 활동을 했고, 고성능 독일차를 탔습니다. 그때까지 차를 평가하는 축, 평가 기준은 주행 질감, 승차감, 기계적 완성도 등이었고, 그 기준 위에서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테슬라를 타면서 새로운 축이 추가되었습니다. 전기차와 SDV(Software Defined Vehicle)를 직접 겪자, 차를 소프트웨어 플랫폼으로 보는 축이 생겼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존 축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계적 완성도 관점에서 독일차의 우위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새로 추가된 직교하는 축이 기존 축에 추가되었고, 현재 제게는 그 가중치가 더 커졌을 뿐입니다. 축이 직교한다는 것은 기존 축과 새로운 축이 독립적으로 가치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관련 내용은 기존 글 「새로운 기술, 새로운 패러다임 — 경험이 기준이 된다」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IT 기술이 발달하면서 등장하는 다양한 웨어러블 제품들을 경험하면서도 비슷한 축의 전환을 경험했습니다. 먼저 시계의 경우 갤럭시 워치를 차면서 시계의 용도가 바뀌었습니다. 저도 한때 멋진 시계에 욕심이 있었습니다. 고급 공예품이자 상징과도 같던 물건이, 이제는 건강과 알림을 다루는 기능 디바이스가 됐습니다. 다만 테슬라와 달리 새 축이 기존 축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여전히 멋진 시계를 볼 때면 한 번쯤 욕심이 나기도 하니까요. 두 축이 공존하는 상태입니다.
반면에 스마트 링은 기회가 돼서 직접 사용해봤지만 재구매하지 않았습니다. 새 축을 경험했으나, 그 축의 값이 제게 의미 있을 만큼 크지 않았습니다. 축의 존재를 아는 것과 그 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다릅니다. 이북(ebook)도 그렇습니다. 전자책의 편의라는 축을 분명히 인지하지만, 저는 여전히 종이책을 택합니다. 축을 알면서도 기존 축의 손을 든 경우입니다.
축의 전환은 꼭 거창한 순간이나 획기적인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소주만 좋다던, 술을 아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와인을 경험하더니 어느새 와인 마니아가 되어 있었습니다. 경험이 축을 연다는 패턴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 축의 인지는 가치 전환의 시작일 뿐, 결과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축을 알게 된 다음 어디에 무게를 둘지는 사람마다 다른, 또 하나의 선택입니다.
경험의 차이, 축의 차이
사람마다 쌓아온 경험이 다르고, 각자 다듬어온 축이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것을 다른 사람이 못 보거나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이걸 인지하지 못하면 대화는 어려워지고 설득은 실패합니다.
이런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상대의 뷰에 축 자체가 없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정보와 논리를 아무리 쌓아도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Hertwig와 Erev의 연구에 따르면, 같은 확률 정보라도 설명(description)으로 접했을 때와 경험(experience)으로 학습했을 때 사람의 판단은 체계적으로 달라집니다. 설명은 상대의 기존 축 위에서 해석되고 끝나는 반면, 새 축을 만드는 것은 대개 경험입니다. 말로 전한 정보가 상대에게 없던 축을 열어주는 일은 드뭅니다.
앞에서 언급한 테슬라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직은 내연기관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전기차 운전자가 늘어나고는 있으나, 대부분은 설명이나 영상으로 전기차를 경험합니다. 그 분들에게 아무리 전기차의 특성을 이야기해도 잘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연기관 자동차가 가지는 감성이나 자동차에 대한 가치 등 소모적 논쟁으로 이어지기 일쑤입니다. 또 테슬라가 아닌 다른 전기차를 경험한 분들과도 대화가 쉽지 않습니다. SDV로서의 완성도와 특징이 다른데 전기차는 다 똑같다며 동일시해버리곤 합니다.
경험이 공유되지 않으니 축도 공유되지 않습니다. 한쪽이 아무리 설명해도 상대에게 그 축이 없으면 이야기는 겉돕니다. 어느 쪽이 낫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축이 없을 때 설득이 왜 구조적으로 막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둘째, 축은 공유하는데 가중치가 다른 경우입니다. 시계가 그렇습니다. 스마트 워치의 효용을 충분히 알면서도 고급 시계를 선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많은 이북 경험자들이 종이책을 좋아합니다. 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같은 축을 놓고 다르게 무게를 둔 것입니다. 이 경우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설득할 대상이 아니라 존중할 선택입니다. 여기에 설득을 시도하면 대화만 상합니다.
두 경우는 겉으로 비슷해 보입니다. 상대가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결과는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인이 다르고, 그래서 대응도 달라야 합니다. 설득에 앞서 진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상대에게 축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축은 있는데 무게가 다른 것인가.
AI 시대, 안다는 착각
AI시대에 경험이 없어도 안다고 느끼게 하는 도구가 생겼습니다. 이것이 앞의 두 어려움을 모두 키웁니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이 진료실과 상담실입니다. 환자와 의뢰인이 AI 답변을 근거로 들고 옵니다. 미국의 한 기업 의뢰 설문(2025)에서 응답자의 39%가 챗봇을 헬스케어 의사결정에 신뢰한다고 답했고, 31%는 진료 전 질문 준비에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Dr. Google에서 Dr. ChatGPT로”라는 제목의 연구가 나올 만큼, 현상에 이름이 붙었습니다.
문제는 AI가 오탐의 두 원인을 동시에 키운다는 데 있습니다. Sharma 연구진의 CHI 2024 연구에 따르면, LLM 대화형 검색 사용자는 기존 웹 검색보다 자기 견해를 확인하려는 질의를 더 많이 했고, 사용자의 견해에 맞장구치는 방향으로 답하는 LLM은 그 편향을 더 키웠습니다. Anthropic의 연구는 주요 AI 어시스턴트들이 진실한 응답보다 사용자 신념에 맞는 응답을 내놓는 경향(sycophancy)을 확인했습니다. 왜곡된 입력이 대량으로 공급되고, 스스로 비튼 해석이 “AI도 그렇게 말한다”로 정당화됩니다.
설득력 자체도 강합니다. Salvi 연구진이 Nature Human Behaviour에 발표한 연구에서, 상대의 개인정보를 제공받은 GPT-4는 상대가 인간일 때보다 상대의 사후 동의를 이끌어낼 확률(오즈)이 81% 높았습니다. 잘못 잡힌 뷰라도 정교한 논리로 뒷받침될 수 있는 환경입니다.
전문가도 예외가 아닙니다. 2023년 Mata v. Avianca 사건에서 한 변호사가 ChatGPT가 지어낸, 존재하지 않는 판례를 확인 없이 법원에 제출해 제재받았습니다. 이후 다른 로펌에서도 같은 실패가 반복됐습니다. 판례라는 축을 가진 전문가조차, AI의 간접 경험을 직접 확인과 혼동하면 오탐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AI가 늘 오탐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Costello 연구진은 AI와의 세 차례 대화가 음모론 신념을 약 20% 낮췄고, 그 효과가 두 달 이상 지속됐다고 보고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의사가 혈액순환 장애로 본 증상을 10대 환자가 챗GPT로 되짚어, 희귀 신경질환 진단에 이른 사례도 보도됐습니다. 여기서는 AI가 오히려 놓친 축을 보완했습니다.
결국, 상대가 가져온 AI 근거가 오탐인지, 아니면 내 뷰의 미탐을 채워주는 것인지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열어봐야 압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상대를 읽는 능력입니다.
반문하는 왜 vs 분석하는 왜
상대의 상태를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은 예전에도 중요했습니다. 다만 모두가 확증편향을 부추기는 강력한 도구를 손에 쥔 지금, 그 무게가 더 커졌습니다.
갈림길은 “왜?”의 톤입니다. 같은 한 글자라도 방향이 반대입니다. 반문하는 왜는 배척입니다. “그걸 왜 믿어요?”에는 상대의 답을 틀린 것으로 미리 정해두는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분석하는 왜는 진단입니다. 이 사람은 왜 이 결론에 이르렀는가, 어떤 경험이 이 뷰를 만들었는가, 이 사람이 가져온 근거에 내가 놓친 것은 없는가.
반문하는 왜의 함정은 비대칭입니다. 상대의 오탐 가능성만 따지고, 내 미탐 가능성은 따지지 않습니다. 앞서 본 오진 사례에서 실패의 자리는 AI가 아니었습니다. 환자의 낯선 호소를 기존 뷰로 서둘러 처리하고 넘어간 지점이었습니다. 분석하는 왜였다면 한 번 더 열어봤을 것입니다.
분석하는 왜로 들여다보면, 상대의 상태는 대개 네 가지 중 하나입니다.
- 축이 없는 경우(미탐) — 정보 대신 경험을 건네야 합니다. 말로 안 되는 것을 말로 밀어붙이지 않아야 합니다.
- 왜곡된 입력 (오탐) — 재료가 잘못된 경우라, 출처를 함께 짚어보면 교정될 여지가 있습니다.
- 스스로 비튼 해석 (오탐) — 정보로는 풀리지 않습니다. 논쟁은 대개 무의미하고, 때로 역효과를 냅니다.
- 가중치가 다른 경우 — 설득할 일이 아닙니다. 존중이 답입니다.
넷은 겉으로 비슷해 보입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면은 같기 때문입니다. 구분하는 방법은 하나, 상대의 답을 분석하는 것뿐입니다. 진단이 서야 대응이 정해집니다.
맺음말
아는 만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상대에게만 겨눌 칼이 아닙니다. 내게도 보지 못하는 축이 있고, 잘못 잡은 오탐이 있습니다. 상대를 읽는 일과 나를 의심하는 일은, 결국 같은 능력의 양면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널리 퍼뜨린 말입니다. 원형은 조선 문인 유한준의 문장을 풀어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보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봅니다. 상대도 그렇고, 나도 그렇습니다.
설득의 시작은 논리가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일입니다.
ChulJoo Kim (김철주)
※ 참고문헌
- Ralph Hertwig, Ido Erev, 「The description-experience gap in risky choice」,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2009. https://pubmed.ncbi.nlm.nih.gov/19836292/
- Nikhil Sharma, Q. Vera Liao, Ziang Xiao, 「Generative Echo Chamber? Effects of LLM-Powered Search Systems on Diverse Information Seeking」, CHI 2024, 2024.5. https://arxiv.org/abs/2402.05880
- Mrinank Sharma 외, 「Towards Understanding Sycophancy in Language Models」, Anthropic, 2023.10. https://www.anthropic.com/research/towards-understanding-sycophancy-in-language-models
- Francesco Salvi, Manoel Horta Ribeiro, Riccardo Gallotti, Robert West, 「On the conversational persuasiveness of GPT-4」, Nature Human Behaviour, 2025.5.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62-025-02194-6
- Thomas H. Costello, Gordon Pennycook, David G. Rand, 「Durably reducing conspiracy beliefs through dialogues with AI」, Science, 2024.9. 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ence.adq1814
- Liesbet Van Bulck, Philip Moons, 「What if your patient switches from Dr. Google to Dr. ChatGPT?」, European Journal of Cardiovascular Nursing, 2024.1. https://academic.oup.com/eurjcn/article/23/1/95/7140165
- Rolling Stone, 「Almost 40 Percent of Americans Trust Medical Advice From AI Chatbots」, 2025.8. https://www.rollingstone.com/culture/culture-features/ai-chatbot-medical-advice-study-1235399973/
- Mata v. Avianca, Inc., 미국 뉴욕남부연방지방법원, 2023.
- 아시아경제, 「의사 말 못 믿은 10대, 챗GPT에 물어봤더니 “의사가 틀렸다”」, 2025.12. https://www.asiae.co.kr/article/2025120909192149913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창비,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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